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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무릎 끓을 대상이 생겼다는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난후, 우리의 인생이 고속도로 위를 달리듯, 뻥 뚫리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이러한 생각들을 하기 쉽다. 물론, 어떠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안에서 우리는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가운데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고, 자신을 따르면 더 이상 우리는 어둠에 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의 한부분 혹은 많은 부분이 어둠에 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빛과 생명의 빛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14)

 

 

초막절 (Feast of Tabernacles) 기간 동안 이루어진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대화

"초막절은 영어로 Feast of Tabernacles 이라 표현되며, 곡식을 거두고 저장한 후 지키는 절기라 하여 수장절이라고도 하고, 장막절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추수 감사제와 비슷한 절기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념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동안에는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첫날과 팔일에 안식하며 성회로 모였고, 칠일동안 화제를 드렸다. 초막절 기간동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생활을 기념하며 초막에 거하였다.

 

초막절 의식으로는 매일 아침 제사장이 금으로 만든 물단지를 가지고 가서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와 제단에 부어바쳤다. 여기엔 광야생활 중에 물이 없을때 반석에서 생수를 내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또한 유대인들은 구약의 전통에 따라 메시아는 초막절에 오신다고 믿었다." 

 

 - 비전 성경 초막절 정의 중에서 - 

 

 

즉, 초막절 기간에 유대인들은 1. 장막생활을 하면서 광야생활을 기억하고 2. 물 붓기 의식을 통해서 반석에서 생수를 내주신 것을 기념하였고, 3. 금촛대 4개를 이용해 불 밝히기를 하여서 광야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기념하였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상의 빛 그리고 생명의 빛을 이야기할 때는 시간적으로 초막절이였다. 이 초막절의 3가지 행사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사실상 이 세가지를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이다. 

 

 

1. 장막이신 예수 그리스도 -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하시매라는 의미는 장막을 쳤다는 의미와 같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장막이라는 의미이다.  (계21:3)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여기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장막으로 표현되었다. 

 

 

2. 실로암의 물..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 - (고전10:4) 다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요7:37) 누구드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즉 예수 그리스도가 물로써 표현되었다. 

 

 

3. 성전을 밝히는 불 (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예수님은 내가 바로 이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도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내가 그 빛이야.. 너희가 기다리던 자가 바로 나라고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14)

 

바리새인들은 초막절이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기념하며,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을때, 이는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라는 것을 의미하셨던 것이다. 즉, 적어도 이 대화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한 것은 우리 인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아예 어둠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빛이 바로 나를,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성경구절이 바로 뒤에 나오는 생명의 빛이다. 즉,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빛이라고 바리새인들에게 말했다. 또한 바리새인들 역시 예수님이 자신을 빛이라고 했을때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가 바로 너희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빛 메시야라는 메세지를 들었던 것이다. 

 

 

내 갈길을 밝히 보여주는 빛이신 하나님인가? 아니면 그가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야인가? 

빛은 분명 어둠을 밝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 우리에게 어두운 곳에서 밝은 빛을 비춰서 우리의 영혼을 밝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메시야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의 인생에서 불편한 부분의 어둠을 밝혀주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된다. 우리의 인생에서 불편한 부분들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어느 정도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은 그러한 불편함을 편안으로 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로다. 바로 너희가 기다리고 기념하는 실체인 그리스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 빛은 우리가 만들어낼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보내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우리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불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우리는 이러한 빛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비춰주실 수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우리 자신에게 비출 빛을 우리 스스로 찾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춰주실때에만 우리는 그 빛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무릎 꿇을 대상이 생겼다는 의미이다. 예수를 믿고 모든 것이 행복하게 변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빛을 제대로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원하는 계획, 건강, 자녀등의 문제앞에 예수님이 물론 빛을 비춰주시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바로 그로다. 

 

 

 

오늘의 포스팅은 이수용 목사의 생명의 빛 vs 세상의 빛을 참조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